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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부장들 모티브 10.26사건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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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남산의 부장들 모티브 10.26사건

사건 공판은 여러모로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그야말로 역사적인 재판이였습니다. 군사재판으로 진행된 1979년 12월 4일 첫 공판을 열었고 1980년 1월 28일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6시 궁정동 안가 그곳에 있었던 네사람

그날 김재규는 차지철과 박정희에게 차례대로 총격을 가했다.

1971년 4.27대통령 선거에 나가려던 박정희는 3선 개헌 당시 보안사령관 김재규에게 이번이 대통령 마지막이니 자신을 도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에 김재규는 각종의 선거운동을 도왔는데 71년 7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김재규에게 3군단장으로 임명하고 지방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갈수록 시국은 어려워져 그해 12월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는데 이 중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부대를 방문할 경우 한번 강력히 설득을 해보겠다는 마음으로 부대의 울타리를 특이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울타리는 안에서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만들었고 박정희 대통령과 단판은 지어보려고 했다합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오지않아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후 김재규는 중앙정보부 차장을 거쳐 건설부 장관으로 임명되고 유신이 선포된 이후 학생들의 시위는 그치지 않고 계속되어 74년 긴급조치가 이따라 실시되는 등 온 나라가 그야말로 살얼음판처럼 아슬아슬한 상태였습니다.

바로 그런 시기에 장관직에 임명된 김재규는 또다시 모종의 계획을 세웠다고 합니다.

10.26이전 김재규의 행적을 되짚어보면

1979년 4월초(6개월 전) 삼군총장들 궁정동으로 초대

1979년10월 12일(14일 전) 매제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김

1979년 10월 24일 (2일 전) 아내에게 고민을 털어놓음

 

김충식 영화<남산의 부장들>원작 작가

10.26 그날은 역사적으로 절대 권력과 성장한 민권 사이의 빅뱅이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61년에 박정희 장군에 의해서 5.16 군사 쿠데타가 이루어지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거쳐서 나라가 굉장히 커졌습니다.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이 나라는 내가 먹여 살렸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은 '나의 자산은 내가 일궜다'라는 생각이 더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과 이런 것은 강화되어 가는데 정권은 장기화 되어 가기 때문에 마그마를 분출할 수 있는 길이 점점 좁아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 최후의 순간이 10.26 입니다. 

1979년 10월 26일 사건의 배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미국의 존재 

박정희의 유신 정부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미국이 지미 카터 대통령이 되면서부터 공공연하게 박정희 정권을 비난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미국과 한국 사이에 조성된 긴장감이 돌게 됩니다. 그런데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씨가 거기에 기름을 부어서 박정희한테 보복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회고록을 쓰기 시작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미국의 의회에 프레이저 청문회에 박정희를 공격하는데 가서 자기가 증언을 하고 다닌 것입니다.

"그 냄새 나는 썩은 권력의 맨 끝에 있는 프레지던트 박! 박 대통령이 지금 한국 민주주의를 비극으로 만들고 있는 자입니다. "

<남산의 부장들 중에서>

부마항쟁보다도 더 먼저 박 정권의 어려움을 불러일으킨 것은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미국의 비정상 정권에 대한 압력, 비난 이런 것들이 쌓인 것이 총성을 올리게 되는 기반이었습니다. 

1979년 당시, 혼란에 빠져있던 대한민국

박정희, 차지철과 문제 해결방식에서 입장 차이가 극명했던 김재규

그래서 김재규는 그 같은 강경과 억업 1세기의 정책을 박정희 통치 한계로 지적하면서 그로 인한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최후의 수단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사건

김재규는 개인적인 원한으로 저지른 것이 아닌 고국을 위한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키기 위한 거사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우발적인 범행이 아니냐는 논란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당시 합동수사본부의 결론은 "김재규의 개인적 결함에 의한 우발적인 사건"으로 결론지었습니다.

사건이후 나온 증거물이 있었다. 1978.10.19일 날짜로 적혀졌다는 박정희 경고친서는 바로 김재규의 위법 행위에 대한 경고 친서였다는 것이다. 그 경고 친서를 받고 중앙정보부장 자리가 위태로워서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대통령을 쐈다고 증거물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김재규 가족은 그 친서로도 살해이유가 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김재규가 차지철을 먼저 쏜 것에 대해서도 논쟁이 벌어졌는데 우발적으로 쏜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김재규가 차지철을 먼저 쏜 것이 그의 개인적인 증오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계획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대통령을 제거하려면 경호실장부터 쏘는것이 당연한 순서가 아니냐고 말합니다. 

사건은 우발과 계획 어느 쪽으로나 해석이 가능한 부분들이 많아서 섣불리 한쪽 얘기만 일방적으로 단정짓을 수 없습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김재규

판결에 참여한 판사 총 13명 중 소수 의견을 낸 6명의 판사들이 있었습니다. 6명의 소수 판사는 피고인을 내란죄로 처벌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고 밝혔던 것입니다. 

소수의견1 - 내란죄 불성립

내란을 일으킬만큼 규모가 크지 않았다는 것이 주장이였고

소수의견2 - 저항권 인정

저항권이란 국민은 국민의 기본 인권을 유린하고 국가의 민주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정부에 대해서 실정법상의 의미 이행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소수의 의견은 묵살되었습니다. 대법원은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수괴미수로 김재규에 사형선고를 합니다. 소수 의견을 내놓은 판사들은 3개월 후 모두 법복을 벗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내란죄로 성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한 대법원 판사 양병호판사의 경우 회의와 압력에도 사표 제출을 거부하다가 고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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